이른 아침, 여주의 방을 나선 민형은 검을 고쳐 들었다. 울부짖으며 괴로워하는 여주를 보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녀를 잠재우고 나선 아침의 공기는 차가웠다. 여름이 오고 있음에도 매워지지 않을 공기였다. '나를... 정말 사랑해?' '사랑해... 줄곧, 그랬어...' '그럼...' 약조 하나만 해줘. 젖은 앞머리를 쓸어넘기던 여주의 눈빛이 단호했다. 무언갈...
'나와 도망가자. 너를 자유롭게 해줄게.' 민형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간절해 보이던 그 눈빛과 나를 꽉 잡은 품. 그리고 유가네에서 머물때완 달리 확고한 그의 위치. 세자의 호위라면 평생을 호의호식해도 모자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의 앞길을 망치겠어. 나는 이제 명문가의 자제도, 누군가의 처로도 살아갈 수 없는 몸이다. 천한 내가 감히 어떻게. "...
"네가 한양으로 가라." "... 다른 아이들이 납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너는 내 후계다. 감히 누가 너에게 헛소리를 지껄이겠느냐." 행수가 뿜은 뿌연 연기가 얼굴을 때린다. 세자의 탄신을 맞아 여러 지방의 내로라하는 기생들이 전부 한양으로 향했다. 본래라면 행수의 일이겠지만, 귀찮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그녀를 보아 자신을 한양으로 보낼 생각인 것이었다...
꿈을 꾸었다. 이제는 덧없는 아주 옛날의 꿈. 흘러내리는 식은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아버지를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어머니와 그 아래의 나. 그리고 아버지가 데려온 소년. 이제 얼굴도 희미해져 가는 그 소년은 나를 붙잡고 무어라 속삭였다. 그와 동시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목이 날아가고 피로 얼룩진 나의 집, 아니 이제는 반역으로 멸문된...
민형 오라버니가 이상하다. 같이 놀자고 손을 끌어도 그저 웃어주기만 할 뿐, 더이상 내게 시간을 쏟지 않는다. 그리고 꼭 같이 붙어 있을 때면 어디선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에 오라버니는 화들짝 놀라며 내 곁에서 떨어져 나간다. 어머니께 혼나기라도 한 걸까. 오라버니는 어머니만 보면 고개를 푹 숙이고 내 곁에서 한 발짝 뒤로 떨어져 걷는다....
잿빛, 그래 잿빛이었다. 이유 모를 역병에 도진 어머니가 뼈만 남은 앙상한 손으로 저를 만진 것도, 그런 어머니를 두고 천하디 천한 기생과 집을 나간 아비도. 그 모두가 나에겐 잿빛으로 보였다. 명문가의 문안비였던 어머니는 그 집의 도련님과 눈이 맞아 사랑을 나누었지만 이내 들켜 맨몸으로 쫓겨났다. 어린 하녀였던 어머니는 정처 없이 돌고 돌아 결국 기방에 ...
붉은 달이 떴다. 그날은 기이하게도 산속에서 울부짖는 고라니의 울음소리도 해마다 태어나는 아이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 쥐죽은 듯이, 서늘한 바람이 부는 길가엔 오로지 핏빛의 거리만 비춰질 뿐이었다. 까마득한 어언 옛날로부터 내려온 김씨 왕조를 시작으로 조선은 이례없는 부국강병을 맞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더욱이 강권을 원하게 된 치들은 더 강한 유...
청산은 내 뜻이오 녹수는 임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우러 예어 가는고. 기억하십니까. 아직도 귓가에 그대의 해금소리가 머무는 것만 같습니다. 아름다운 달이 뜨던 밤 고요한 강가의 소리에 맞추어 평생을 기약하던 그날의 소원을 저는 아직 잊지 못하였습니다. 그 무엇 하나 가지지 못했던 나에게 그대는 참으로 과분한 사람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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